미국 남북전쟁 직전
1857년 9월 13일에 펜실베이니아 중앙에 있는 데리 타운쉽 농장.
미국에서 건너온 독일인과 스위스이민자의 자손이었던
Veronica "Fanny" Snavely(독일) and Henry Hershey(스위스) 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기가 하나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Milton Snavely Hershey(1857 년 9 월 13 일 – 1945 년 10 월 13 일)
이 사람은 훗날 우리가 알고 있는 키세스 초콜릿을 만드는
세계 최대 초콜릿 기업 허쉬스의 창업주가 됩니다.
세계적인 대기업을 만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버지 헨리 허쉬는 큰 기회만 잡길 바라는
몽상가같은 사람이었고
거기에 진성 낙천주의자였다고 합니다.
또 끈기 까지 없던 사람이라
여러 지역에서 여러 사업들을 계속 시도했습니다.
그 때문에 가족들은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고
그런 그의 실패에 질린 아내 페니는 그와
결국 1867년 별거.
아내 페니가 밀턴의 양육을 맡게 됩니다.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아버지 헨리는
계속 사업을 한다고 미국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의 어머니 페니는 헨리 허쉬와 달랐습니다.
독실한 개신교자였던 그녀는
열심히 노동하는 가치에 대한 교육을 밀턴에게 주입했거든요.
그리고 밀턴은 곧 시골에서 이 초등학교 저 초등학교를 방황하던 생활을 그만두고
4학년 14살의 나이로 교육을 마무리하며 노동 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1871년 펜실베이니아 갭에 있는 지역 독일 신문을 영어로 번역해 발간하는
인쇄사 Sam Ernst 밑에서 일을하게 됩니다.
하지만 평소 사탕 만드는것을 좋아하던 밀턴은
딱히 그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하루는 그가 일하는 도중 모자를 기계에 빠뜨려
업무에 차질을 만드는 바람에
성질 급하던 Sam Ernst는 밀턴을 곧바로 해고했습니다.
그런 밀턴을 그의 아버지는 다시 인쇄사에게 데려가 간청해
두번쨰 일할 기회를 얻었지만
평소 밀턴을 지켜보던 Mattie Snavely 이모와 그의 엄마는
다른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밀턴이 평소 관심있어 하던 제과 제조 기술을 배우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렇게 펜실베이니아 랭캐스터의 Joseph Royer이라는제과 제조업자
밑에서 수습생으로 일합니다.
그렇게 일을 하던 중 1876년
미국 최초의 세계 박람회 센테니얼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여기서 한 몫 챙겨야 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닮아 사업가의 야망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수습생으로 일한 4년 뒤
150달러를 그녀의 이모에게서 빌린 후
1876년
필라델피아의 중심지에 캔디샵을 차립니다.
하지만 야망만 물려 받은게 아니라 사업 재능도 물려받았던 그라서 런지
밀턴은 이모, 엄마와 함께 5년간 그곳에서 열심히 장사를 해도
제대로된 수익을 만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6년째엔 결국 파산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방랑자 아버지 Henry는 밀턴을 위로하며
편지를 밀턴에게 하나 보냅니다.
"본인이 여행중이던 콜로라도의 덴버로 찾아와
새로운 사업을 하자"
결국 밀턴은 필라델피아에서 장사를 접고
덴버에서 그의 아버지와 재결합.
하지만 그 당시 광산업으로 유명하던 콜로라도 주 덴버는
3년간 경제 침체기에 빠져 광석 생산이 부진에 빠져있었고
이런 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밀턴은 판단.
그래서 그 지역에 있던 제과 제조업자 아래에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는 이곳에서 후에 도움이 될 엄청난 것을 배우는데
바로 신선한 우유로 카라멜을 만드는 법을 개발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우유로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당시 그는 이 사실을 당연히 몰랐고)
단지 남에 밑에서 일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이후 시카고, 뉴올리언스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났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1883년 뉴욕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두번째 사업을 시작하는데
조금 잘 풀리나 싶었으나
3년 뒤 1886년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업 못하는 아버지의 자식인 점을 인증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번의 사업이 실패했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그의 시작.
랭커스터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친척들은 그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협조적이었던 그의 어머니조차도 그를 도와주기를 거부하고
밀턴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렇게 낙심하며 거처하던 곳을 찾던 중
1880년 고향사람이자필라델피아 본인의 과자 가게에서 당시 직원으로 근무하던
William Henry Lebkicher라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Henry는 일단 남북전쟁에 참여한 연장자였고
야망있는 어린 사업가 밀턴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그라
갈아입을 옷과 끼니를 때울수 있는 음식.
그리고 밀턴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밀턴이 뉴욕에서 랭커스터로 우편 부친
제조 기계들, 가구들의
배달비까지 모조리 대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버지와 사업 수완은 비슷했지만
한편으로 장인정신과 끈기가 있던 밀턴은
그렇게 Henry의 도움을 받으며 재기할 힘을 얻었고
다시 가족들을 설득했고
결국 또 다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Lancaster Caramel Company'
이모와 엄마를 이끌고
덴버에서 배웠던 카라멜 만드는 기술을 활용해
공장 자리를 얻어
Crystal A 이라는 카라멜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도 역시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환점이 발생합니다.
이름 모를 영국 수입업자가 카라멜을 영국으로 대량 주문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밀턴은 대량으로 카라멜을 제조할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역 은행에 자금을 빌리러 갑니다.
'Lancaster County National Bank'
하지만 과거 사업 실패의 경험이 있던 그라 신용등급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운이 좋은건지
마법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은행원이 밀턴에게 감명을 받아
은행원 본인 이름으로 사업 자금을 대출받아 밀턴에게 준것.
어쨌든 수출은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고
이번을 계기로 그의 사업은 확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건물 한구석을 차지 하던 그의 사업장이
건물 전체로 확장되었고
1890년엔 건물주로..
그리고 그가 있던 곳이 Church Street이란 곳이었는데
Church Street의 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매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랭캐스터의 45000 스퀘어 피트
총 1264.5평의 부지라는 역사를 써냈습니다.
그리고 그에 "Lancaster Caramel Company"는 랭캐스터 밖으로
필리델피아 주 밖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렇게 대 성공 인생 역전을 거둔 밀턴 허쉬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더이상 사업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편하게 사치부리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업 기질이 발동합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1893년 어느날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박람회에서
밀크 초콜릿 제조 현장을 목격한 그는
곧바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박람회가 끝난 후 장비를 구입해 버립니다.
그때부터 곧바로 밀크 초콜릿 제조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2편에 계속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에서 미국 대통령까지....👨🎓 (0) | 2019.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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